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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 워킹홀리데이/1. 록햄턴(Rockhampton)

[09년 12월 24일, 목] 그들의 무더웠던 크리스마스 이브

by 이거는 2010. 3. 5.

  브리즈번, 비온뒤 맑음

  7시쯤 일어나 어제 작성한 이력서를 워드로 바꾸어 저장해 집을 나서니 8시였다. 인쇄 후 20부 복사. 일을 구하기 위해 이력서를 돌리는 것과 아직 못 가본 시티주변 역들을 가볼 계획이었다. 그리고 아직 적응안되는 수돗물과, 생수를 사서 마셔도 우리나라 생수와 미묘하게 다른 맛 때문에(허준 曰, 조선의 물맛은 33가지로 구분되는데 그 중 으뜸은 양기의 태양이 뜨기 이전에 긷는...) 보리차를 구할 계획이었다.

  시티 주변을 돌아볼 계획이므로 교통편을 일일권(Daily, 데일리)으로 끊고(1존 데일리 4.8불) 우선 차이나타운부터 가봤다. 상점은 몇 개 있지만 이곳도 뭐 볼만한게 별로 없었다. 그나마 열린 곳에 들어가 일자리가 있냐고 물어보고 이력서를 주고 나오려 했지만 받을 생각도 안했다. 토미형 말로는 여기가 키친핸드 구하기 가장 좋은 곳이랬는데 크리스마스 연휴때문인 것 같았다. 몇 군데 기웃거리다가 밀턴(Milton)역에 있는 직업소개소를 가 보기로 했다. 역에 내리자 직업소개소 가는 길에 카페가 너댓군데 있어 혹시 일 할 수 있냐고 물어보니 자리가 없다고 했다. 이력서는 잔뜩 준비되어 있는데 정작 쓰지는 못했다. 한가닥 기대를 걸고 직업소개소를 찾으니 웬걸. 이사갔는지 포스터는 있지만 사무소는 빈 듯 했다.(지금와서 생각해보면 46/33이 33번지 46호인 것을 반대로 착각한 듯 싶어 조만간 다시 확인해봐야겠다.)

  아쉬운 마음을 뒤로 하고 다시 트레인을 탔는데 이곳 트레인은 역에 대한 방송이 정말 미흡하다. 게다가 잘 들리지도 않는다. 우리나라의 경우 '디스 스탑이즈 oo, oo. 플리즈 온 유얼 레프트.' 이렇게 하는데 여기는 대뜸 역이름 한번 읽고 끝이다.

  로마 스트리트에 내려 시티를 돌아다니며 이력서를 돌리기로 했다. 어디부터 갈까 고민하다가 강변에 음식점이 많던 것이 기억나 그곳부터 가 보기로 했다.
  역시나 손님은 바글바글 했는데 다들 자리가 없다고 다음 주 쯤에나 다시오라고 했다. 이력서도 받지 않았다. 호텔은 자기네 이력서 양식에 적어달래서 적어줬을 뿐. 이력서는 찬밥이었다. 내일부터는 연휴와 주말을 겹쳐 신년연휴. 거진 한 주를 놀고 돈 까먹게 생겼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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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리스마스 분위기도 간혹 산타 복장을 한 여자들이 있긴 했지만 더워서 그런지 한국같이 분위기가 나지는 않았다. 겨우 온 지 3일째 되는데 거리에서 샤방하게 차려입고 도도한 표정을 선글라스 아래 감추고 있는 여성들은 다 한국인임을 알게되었다. 걸친 옷은 몇 벌 안되도 한국 여자가 정말 옷 잘입는 것도 알게되었다. 반대로 한국 남자는 역시나 MLB 모자로 특징이 함축된다.

  편의점에서 우리나라의 교통카드같은 고 카드(Go card)를 샀다. 앞으로는 충전해서 이것을 쓰기로 했다. 아무리 이곳의 교통편이 비싸다고 하지만 모두들 이용하는데 우리나라처럼 뭔가 비교적 좀 더 싸겠지? 20불을 충전하고 나왔다.

  일도 못구하고 정말 평범한 크리스마스가 되겠구나.. 같이 쉐어하는 인도사람인 아룬하고 저녁 때 파스타나 만들어 먹어야겠다. 지금 사면 무거우니까 시티 한인상점에서 보리차만 사고 집 주변의, 걸어서 15분 거리라는 큰 매장에서 나머지 먹을 것들을 사기로 하고 다시 윈저로 돌아왔다.
  2시 반. 엄청난 더위와 아침부터 돌아다닌 탓에 교통편을 이용할까 하는 생각이 간절했지만 걸어보면서 집 주변도 익히고 매장까지 가는 길도 알아둬야겠다는 생각에 걷기로 했다. 참, 이곳의 버스는 열차보다도 더더욱 별로인 점이 다음 역에 대한 아무런 방송이 없다. 그냥 때가되면 벨을 누르고 기다린 후 내리면 된다. 그러니 길과 역을 모르면 완전 헤메게 된다는 사실. 더군다나 방향 감각도 아직 없는데.

  토미 형은 집에서 마트까지 걸어서 10분, 15분 정도라 했는데 정말 남자 걸음으로 열심히 걸어야 15분쯤 걸리는 거리에 큰 매장이 있었다. 돌아오는 길에 짐으로 무거워진다면 더욱 시간이 걸릴 것을 고려해 파스타, 파스타 소스, 과자, 캔음료 정도만 간단히 샀다. 장본 것을 담아오려고 큰 백팩(45리터짜리)을 가져왔는데 무겁긴 했지만 많이 들어가서 좋았다. 돈 벌면 최우선으로 차부터 사야지.

  땀을 뻘뻘 흘리며 집에 들어와 청소기를 돌린 후(기분상. 서비스로 거실도 청소했다.) 샤워를 하고 나니 아룬이 친구 한 명과 같이 들어왔다. 나이는 21살이고 이름은 압둘이라고 했다. 항공 정비를 배우는 같은 학교 친구라고 했다. 이따가 친구 한명이 더 와서 자고 간다는데 괜찮겠냐고 하기에 당연하다고 말해주었다. 난 쿨해서 혼자서 지내는 이브따위 겁나지 않아. 아돈케어~(이 자식!)

  지쳐서 쉬고 있는데 주방에서 달그락 달그락 뭔가 만드는 소리가 들렸다. 잠시 뒤 아룬이 들어와서는 자기네가 오늘을 기념하기 위해 음식을 만들었단다. 같이 먹고 놀자고 해서 나가봤더니 카레 닭요리, 오븐에 튀긴 닭, 자브티? 자빠티? 인가 하는 인도식 밀떡, 칠리소스가 들어간 버섯 계란... 음... 한국식으로 두루치기, 위스키와 맥주, 음료가 준비되어 있었다. 흑.. 난 아무것도 준비한게 없는데. 너무나 고마웠다.(아까 말한 이 자식 취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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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얘가 18살짜리 인도인 -


  조금 뒤 친구 한명이 더 왔는데 28살, 이름은 샤틴이라고 했다. 난 말도 잘 못하고 쑥쓰러움 많아서 괜찮으려나 모르겠다고 예의상 몇 마디를 했더니 괜찮다고 해서 함께 어울렸다. 알고 보니 샤틴은 네팔, 압둘은 말레이시아, 인도에서 온 아룬, 한국의 나, 이렇게 국적이 각기다른 네 남자의 즐거운 만찬이 시작되었다. 음식은 다들 맛있었다.

  압둘은 어린 나이답게 조금은 욱하는 기질과 좋고 싫음이 분명한 성격이었고, 샤틴은 나이답게 차분하고 생각이 깊었다. 아룬은 정신없는 스타일. 얘는 평소에 노트북으로 비행 시뮬레이션이나 친구들과 화상통화를 한다. 그런데 자세가 완전 스타킹급. 여태 상상도 못한 자세인데 大 자로 누워 무릎을 세워 노트북을 올리고 헤드셋을 끼고 게임을 한다. 하루종일 자세가 별로 변하지 않는게 더 신기. 게다가 이 열악한 호주의 인터넷 환경에서 p2p를 하는 용자다.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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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한국에서와 같이 술자리라면 으레 쓰이는 주제들로 밤을 지새웠다. 다만 뒷담화, 여자이야기가 없었을 뿐. 나는 몇 가지 카드 마술을 보여줬고 이후에 카드놀이도 했다. 다들 영어를 잘했는데 다만 발음은 약간씩 달랐다. 영어를 10년 이상 배웠는데 똑같이 배워온 나는 왜 제대로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건지. 말하고자 하는 바를 표현 못하는 답답함을 알게 되었다. 개그콘서트의 개그처럼 아~~~ 이래서 갓난아기가 우는구나 싶어졌다. 오늘, 지금 이 시간 같은 기회가 많이 주어진다면 호주에 온 것도 후회스럽지 않다고 생각된다.

인쇄 및 복사 3.2
1존 데일리 4.8
빅맥 6.5
물 1.2
보리차 1.55
교통카드 20
음료, 빵, 잼, 샌드위치용 고기, 파스타, 양념, 과자 36.2

총 지출
73.45